인구수 약 4만의 항구도시 메인 주 체스터헤이븐(*가상의 도시). 엑스맨과 브라더후드 오브 뮤턴츠, 두 집단이 크게 충돌했다.
이 마찰은 최악의 비극으로 결말을 맺었다. 전투 도중 엑스맨 소속의 뮤턴트 ‘미라클’의 뮤테이션이 폭발한 것이다. 순식간에 일대가 초토화되었고, 폭심부에 있던 많은 뮤턴트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그대로 도시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제발로 도망치거나 탈출한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십 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는 말이다.
폭발과 동시에 미라클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시에도 수백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 손상이 가장 심했던 구역은 본디 엑스맨의 미 북동부 거점으로 사용되던 웨어하우스와, 도시 경제의 많은 부분을 도맡고 있던 군수 회사 ‘프레더릭 인더스트리’의 본사 건물이 있던 항구 유역이다.
엑스맨 측에서는 이에 책임을 지고 도시 복구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체스터헤이븐 시에서 이를 거절했다. 대신 남겨진 엑스맨의 웨어하우스와 장비를 강제 압류하고 두 집단에게 절대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다.
가장 집요한 기자들마저 도시 일부를 날려버린 사건의 배후가 두 뮤턴트 집단이라는 사실 외에는 보도할 수 없었다. 사건 이후의 언론 통제 때문이었다. 수많은 추측만이 난무하는 사이 경제와 치안이 급격히 악화됐고, 시민들은 복구 작업에 지지부진한 시 대신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이들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뮤턴트가 '위험하고 통제되지 않는 존재'라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수 년 만에 체스터헤이븐은 미 전역에서 가장 반 뮤턴트 정세가 강한 도시중 하나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인구 비율 대비 뮤턴트가 가장 많이 사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느리게나마 나아지고 있던 뮤턴트에 관한 인식은 순식간에 악화됐다. 예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감추어져 있던 차별이 다시 물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체스터헤이븐 교외 지역 외딴 곳에서 일어난 일가족 몰살 사건을 기점으로, 60년대 이후 사라졌던 뮤턴트 사냥이 부활했다. 베트남전 패전의 탓을 뮤턴트에게 전가하거나, 뮤턴트와 일반인 ‘양쪽 모두를 위해’ 뮤턴트 아동을 입학 시기에 선별해서 분리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지역사회 정치 후보자들은 뮤턴트 채용 불이익이나 입대 시의 신체 검사 강화, 국경 지역 검문 강화를 공약으로 내걸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안전한 삶을 위한 공약에 환호하며 표를 던졌다.
오직 우리들만이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오로지 우리에게만.
그리고 1987년 11월 24일.
이변이 일어났다. 세레브로상에서 체스터헤이븐의 모든 뮤턴트 신호가 동시에 사라졌다. 최악의 경우, 대규모의 뮤턴트 처형 사태가 벌어졌거나, 아니라도 도시에 사는 뮤턴트들에게 커다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엑스맨과 브라더후드 오브 뮤턴츠, 두 집단은 이 전무후무한 단절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7년 만에 다시 체스터헤이븐으로 향한다.
7년 만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애도할 시간조차 가질 수 없었다. 한때 함께였던 우리 사이에는 아직 깊은 상처의 골이 남아 있다…….